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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인들은 인도·이란 계통의 민족이었다. 최근 일부 학자들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 의하면 종족의 명칭도 ‘스쿠타(skuta)’라는 고대 이란어에서 나왔으며, 이는 오늘날 영어에서 ‘shooter’와 동일한 어원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스키타이는 ‘궁사’를 뜻하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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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a26.01.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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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

(1)]

황금의 유목문화

|

스키타이

스키타이는 인류 최초의 유목민족

,

페르시아도 굴복


기원전

7~6

세기경 출현

,

흑해 북안

·

이집트

·

시리아 휩쓸며 황금강국 건설… 왕족

·

유목

·

농경 스키타이 부족으로 구성돼

▲ 스키타이 고분에서 출토된 황금빗 상부의 전투장면 장식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구약시대에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예레미아라는 이름의 선지자가 있었다. 기원전 7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에 걸쳐서 활동했던 그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이 극심한 종교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리라는 것을 신의 계시를 통해 거듭해서 경고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쓴 ‘예레미아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보라! 한 민족이 북방에서 오며 큰 나라가 땅 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나나니, 그들은 활과 창을 잡았고 잔인하여 자비가 없으며 그 목소리는 바다가 흉용함 같은 자라. 그들이 말을 타고 전사같이 다 항오(行伍)를 벌이고, 딸 시온 너를 치려 하느니라!”(6장 22~23절) 여기서 그가 마치 환상을 본 듯 서술하고 있는 활과 창을 잡고 말을 타고 줄을 지어 엄습하는 전사들은 아시리아인도 바빌론인도 아니었다. 바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유목민족이라 칭해지는 스키타이였다.
스키타이인들은 인도·이란 계통의 민족이었다. 최근 일부 학자들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 의하면 종족의 명칭도 ‘스쿠타(skuta)’라는 고대 이란어에서 나왔으며, 이는 오늘날 영어에서 ‘shooter’와 동일한 어원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스키타이는 ‘궁사’를 뜻하는 셈이었다. 아마 큰 무리를 이루어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던 그들의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은 다른 민족들이 붙여준 이름일 것이다. 스키타이라는 명칭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데,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 우리 문화의 원류 가운데 하나로 ‘스키타이’ 혹은 ‘스키토-시베리아’ 문화라는 것이 소개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민족의 기원과 역사에 관해서 가장 상세한 기록을 남긴 인물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였다. 그는 ‘역사’라는 책에서 스키타이의 기원에 대해 몇 가지 설화를 전하면서 자신이 보기에 가장 신빙성이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그들은 원래 아락세스강(오늘날의 볼가강) 동쪽에 살던 민족이었는데, 마사게태라는 민족의 공격을 받게 되자 서쪽으로 도망쳐 강을 건너서 흑해 북안(北岸·북쪽 해안)의 원주민 킴메르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킴메르인들이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도망치자 스키타이는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는데, 그만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서 근동(近東) 지방으로 내려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예레미아는 바로 그때 내려온 스키타이를 목격한 것이었다. 이 스키타이에 관한 최초의 기록도 당시 근동의 강국이었던 아시리아의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된다. 즉 이슈파카이 왕이 이끄는 아슈쿠자이라는 집단이 아시리아의 왕 에사르핫돈(기원전 680~669년)과 전투를 하여 패배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서 아슈쿠자이가 스키타이를 지칭한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당시 근동 지역에는 아시리아, 메디아, 우라르투 등 여러 세력들이 각축을 벌여 정치적으로 극도의 혼란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무대에 출현한 스키타이는 이들 국가와 때로는 연맹하고 때로는 적대하면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슈파카이의 아들인 파르타투아는 과거의 적이었던 에사르핫돈과 혼인동맹을 맺게 되었는데, 후일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메디아에 의해 포위 공격당할 때 그의 아들이 스키타이의 왕이 되어 원군을 이끌고 와서 메디아를 격파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뒤 스키타이는 이집트 원정에 나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남진했는데, 겁을 먹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직접 선물을 갖고 올라와 스키타이의 국왕 마디에스에게 바치고 화평을 맺었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스키타이는 이처럼 28년 동안 중근동 각지를 호령하면서 여러 민족으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하고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지만, 메디아의 국왕 퀴악사레스가 그들을 연회에 초대하여 술에 잔뜩 취하게 한 뒤 몰살시켜 버림으로써 그들의 패권은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고 한다.

▲ 스키타이 시대의 중앙유라시아

근동을 떠난 스키타이인들은 다시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서 흑해 북안의 초원으로 돌아갔다. 헤로도투스는 이들이 북방으로 귀환한 뒤 일어난 흥미로운 사건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스키타이인들이 근동을 원정하는 동안 부인들이 현지의 노예들과 관계를 맺어 낳은 자식들이 귀환한 옛 주인에게 예속되기를 거부했고, 양측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스키타이인들은 그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 그런데 노예들을 상대할 때는 칼이나 활이 아니라 채찍을 써야 한다는 누군가의 제안을 받아들여 채찍을 휘둘렀더니 겁을 먹고 다시 복종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스키타이인들이 흑해 북안 즉 돈강과 다뉴브강 사이의 초원지역을 점령하고 국가를 건설할 때 군사적 정복과 함께 현지 주민과의 민족적 혼합도 동시에 일어났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흑해 북쪽 해안을 근거로 건설된 스키타이 국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우선 ‘왕족 스키타이’라는 집단인데 최고의 지배층을 이루었고, 그 다음에는 일반 유목민으로 구성된 ‘유목 스키타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피정복민 ‘농경 스키타이’가 있었다. 이러한 복합적 구조는 스키타이 국가가 결코 단일한 종족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질적인 다양한 부족들의 결합체였음을 말해준다.
흑해 북안으로 돌아온 스키타이는 기원전 6세기 말 페르시아 제국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냄으로써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다리우스 대제는 8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스키타이를 잡기 위해서 초원을 헤맸으나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절망에 빠진 그는 스키타이인들에게 사람을 보내 비겁하게 도망만 다니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나와서 싸우자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는 도망다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생활방식이 원래 그렇다”는 조롱 섞인 답신뿐이었다. 식량이 고갈된 페르시아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스키타이는 초원에 물이 귀하므로 그들이 물이 있는 곳을 따라 퇴각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맹추격을 시작했으나, 페르시아인들은 초원의 지리에 어두워 물도 없는 엉뚱한 길로 가는 바람에 전멸 위기에서 벗어나 구사일생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외부의 위협을 극복하고 성취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추진된 그리스와의 교역은 스키타이 국가에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했다. 스키타이의 발전과 번영은 그들이 남긴 고분에서 발견된 출토물이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흔히 ‘쿠르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고분들은 흙과 돌로 쌓여진 작은 언덕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규모가 큰 것은 높이 20m에 이르며 그 아래에는 목곽분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들 스키타이 고분들은 특히 쿠반 반도(켈레르메스, 코스트롬스카야)와 크리미야 반도(쿨 오바, 체르톰리크, 솔로하)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그곳이 스키타이 국가의 핵심적인 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 유물 중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히 많아서 스키타이 귀족들의 재화와 부의 규모를 추측케 할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특유의 문화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학자들은 흔히 스키타이 문화의 3대 요소로 마구, 무기, 동물양식을 드는데, 이 가운데 특히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동물양식이다. 이같은 스키타이 동물양식이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학설이 대립되어 왔다. 하나는 남러시아 자생설이고, 또 하나는 서아시아 기원설이며, 마지막으로 중앙아시아 기원설이 있다. 스키타이의 유물들을 보면 남러시아나 서아시아의 영향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70년대 전반 남시베리아의 투바공화국에 위치한 아르잔이라는 곳에서 직경 120m에 달하는 거대한 고분이 발견되었고, 거기서 출토된 유물들은 결정적으로 중앙아시아 기원설의 손을 들어주었다. 탄소 연대측정 결과 지금까지 발견된 어떤 동물양식의 유물들보다 시기가 빠른 기원전 9세기 중후반으로 판명된 이 고분에서 후일 스키타이 동물양식의 중요한 요소를 분명히 갖고 있는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스키타이 국가의 중심지는 흑해 북안이었다. 그러나 동물양식을 특징으로 하는 고대 유목문화는 유라시아 초원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고, 이는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서 확인된다. 1940년대 후반 알타이 고산지대의 파지리크라는 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고분은 땅을 파서 시신이 담긴 목곽(木槨)을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아올린 소위 적석목곽분의 구조를 지녔다. 적석총의 특징을 지닌 신라시대 고분들과의 유사성 때문에 우리나라 학자들에게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파지리크 고분은 이미 오래전에 도굴되었지만, 묘실 안팎으로 스며든 이슬과 빗물이 결빙되어 고분 전체가 일종의 냉장고가 되어버려, 그 속에 있던 시신과 많은 부장품들이 전혀 부식되지 않은 채로 발견되었다.
미라 처리되어 실로 꿰맨 흔적이 보이는 시신의 피부에는 동물양식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손가락 끝으로 눌러보면 피부가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정도로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순장된 말들과 거기에 씌웠던 말가면이 나왔고, 목제품·펠트·직물 등에도 스키타이 특유의 양식들이 보였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헤로도투스가 묘사한 바와 같이 제사의식을 행할 때 대마초를 흡입하는 데에 사용하는 도구들이 그대로 발견되어, 그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하고 신빙성이 있는가 하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에서 직조된 카펫,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동거울 등도 발견되어 광범위한 교역의 존재도 짐작케 한다.
그 뒤 1969~1970년에는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라는 도시에서 멀지않은 이식 쿨 호수 부근에서 기원전 5~4세기에 속하는 다수의 고분이 발견되었고 여기서 소위 ‘황금인간’으로 알려진 유해가 발굴되었다. 이런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은 신장 165㎝로 추정되는 청년이 입고 있던 황금으로 된 의상 때문이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4개의 화살이 꽂혀 있는 장식을 한 모자이다. 고대 페르시아 자료에는 ‘사카 티그라하우다(Saka Tigrahauda)'라는 종족이 언급되어 있는데, ‘티그라’는 화살을, ‘하우다’는 모자를 뜻하며, ‘사카’는 ‘스키타이’와 동일한 어원을 갖는 종족명칭이다. 따라서 그것은 ‘화살 같은 모자를 쓴 사카족’을 뜻한다고 할 수 있으니, ‘황금인간’은 바로 이 종족에 속한 귀족청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스키타이 동물양식의 특징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더 서쪽의 몽골리아 초원으로까지 확산되었다. 1924년 울란바토르 북방 80㎞에 위치한 노인 울라 고분은 동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인들의 것으로, 여기서 나온 다량의 부장품 가운데 그리핀이 순록을 공격하는 모양이 수놓인 카펫이 발견되었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직물이나 칠기 등이 다수 있고 그 중에는 전한 건평5년(기원전 2년)의 명문(銘文)을 갖고 있는 것도 있는데, 이는 흉노가 한나라와 조공 관계를 통해서 상당량의 물품들을 입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은 고비사막 남쪽의 내몽골 지역에서도 강하게 발견되고 있다. 흔히 ‘오르도스 청동기’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초원 청동기 제품들 중에는 맹수가 초식동물을 덮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최초의 유목민 스키타이가 출현했을 때부터 중앙 유라시아는 대륙의 주변부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문화적 특징을 나타내었다. 그것은 흑해 북안에서부터 내몽골 초원에 이르기까지 중앙 유라시아 전역을 관통하며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고립된 문명이 아니었다. 크리미아 반도에서, 알타이 산중에서, 또 몽골고원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이미 3000년 전부터 중앙 유라시아의 주민들이 주변의 그리스, 페르시아, 중국 등과 밀접한 접촉과 교류를 해왔음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지역은 유라시아 문명권의 공통된 접점으로서 주변 지역의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을 흡수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요소들을 수용하고 변화시킨 뒤 다시 주변지역으로 방출함으로써, 수동적 전달자가 아니라 적극적 참가자로서 유라시아 역사를 움직여갔던 것이다. ▒

동물양식

(animal style)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후 2~3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초원지역에 광범위하게 나타난 예술적 표현양식이다. 스키타이인들의 고분에서 발견된 수많은 유물에서 전형적인 형식이 보이기 때문에 ‘스키타이 동물양식’이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져 있다. 나무·쇠·청동·금·은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였고, 사슴·양·말·표범·매·그리핀과 같은 동물들의 모양을 양식화(stylize)하여 표현하였다. 특히 황금으로 만들어진 항아리·머리핀·목걸이·버클·장식판 등은 매우 정교하고 풍부한 예술적 표현을 담고 있다. 항상 이동하는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작고 가벼운 물건들을 휴대했고 따라서 장식물의 작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동물의 몸이 둥글게 말려 있는 모습, 무릎을 완전히 꺾어서 구부린 상태, 맹수의 공격에 저항하면서 목이 180도 젖혀진 모습 등이 묘사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또한 맹수가 공격하는 모습이 표현된 장식품을 의복과 무기에 부착한 것은 그러한 장면이 지니는 상징적 주술성과 공격성이 그것을 부착한 용사에게 전이되기를 바라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었다.

[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

(2)]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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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의 물결

헬레니즘을 아시아로 전파한 숨은 공신은 페르시아 제국


헬레니즘 확산 이후 불상 출현

▲ 탁티바히의 간다라식 불상

이집트에서인도까지 광대한 영토를 연결한 간선도로 건설
페르시아 멸망시킨 알렉산더 동방원정이 헬레니즘 전파
아프가니스탄 고지대에서도 그리스식 도시 발견돼

석가모니 사망 후 500년 동안은 불상 없어


간다라 지방 불상의 옷·자세 등 그리스 신상과 비슷
중국 서북부 둔황 지역 넘어 한반도까지 영향 끼쳐

무엇보다도 부처의 얼굴 모습이 그러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가 걸치고 있는 승복도 그리스·로마인의 토가를 그대로 본뜬 듯하며, 서 있는 자세 또한 그리스 신상에서 흔히 보이는 콘트라포스토,
즉 한쪽 다리를 살짝 구부린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세기 초 중국의 가장 서북쪽인 신장(新疆)에서 타클라마칸사막 아래에 묻혀 있던 폐허의 도시 미란(Miran)이 발견되었다. 거기서 주민의 주거지, 불교 사원의 흔적과 함께 고대인의 생활을 추측케 하는 많은 자료가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로마풍 인물이 묘사된 벽화였다.
거기에는 ‘티타(Tita)’라는 화가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었다. 이름으로 미루어볼 때 그가 서방 계통의 순회화가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사실 신장 지방에서는 이 벽화 외에도 그리스의 신상이 조각된 인장(seal)도 상당수 발견되어, 여기서 수천 ㎞나 떨어진 지중해를 본산지로 하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준다. 도대체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헬레니즘의 물결이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파미르고원을 넘어서 지금의 중국 서북부 지방에까지 이르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물론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일 것이다. 비록 그에게 무너져버리긴 했지만 소아시아 반도에서부터 중앙아시아 변경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통치한 페르시아 제국이 없었다면 헬레니즘의 광범위하고도 신속한 확산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헬레니즘을 운운하기에 앞서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이란의 서북부 케르만샤 지방에 가면 비스툰 비문을 볼 수 있다. 높이 105m의 깎아지른 절벽에 가로 22m, 세로 7.8m의 면적에 새겨져 보는 이를 압도하는 이 비문은 ‘비문들의 여왕’이라는 별명에 손색이 없다. 중앙에는 등신대 사이즈(1.72m)의 다리우스(Darius) 대제가 위로는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의 축복을 받으며, 발 아래로는 찬탈자 가우마타(Gaumata)를 짓누르고, 뒤에서 궁수와 창수의 호위를 받으며 반란을 일으킨 수령들 9명을 사슬에 묶어 부리는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그 주위로는 다리우스의 업적을 칭송하는 명문이 설형문자로 새겨져 있고, 내용은 고대 페르시아어, 엘람어, 아카드어 등 모두 세 가지 다른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주인공은 사실 다리우스가 아니라 퀴로스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기원전 539년 바빌론을 무너뜨리고 서아시아의 주인이 되었지만, 기원전 530년 중앙아시아 초원지역을 호령하던 마사게테(Massagetae)라는 부족과의 전투에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퀴로스가 죽은 뒤 제위를 이은 그의 아들 캄비세스는 이집트를 원정해 영토를 확장시키기도 했으나 기원전 522년 사망하고 말았고, 캄비세스의 아들을 참칭(僭稱)한 가우마타가 등장하면서 제국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 혼란을 수습한 인물이 바로 황족 출신의 다리우스였으며, 내란을 평정한 직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스툰 비문을 새겼으니 기원전 519년의 일이었다.
다리우스에 의해 설계된 통치의 기본 구조는 ‘성(省)’제도였다. 전국을 20개 정도의 성으로 분할하고 각각에 총독(kshatrapa, 영어 satrap의 기원)을 임명했는데, 그에게는 군사권을 제외한 사법·징세·행정 등 광범위한 민정권이 부여되었다. 각 성은 매년 은을 세금으로 납부해야 했다. 행정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잇는 주요 간선도로를 건설했다. 특히 소아시아의 사르디스에서 제국의 수도인 수사에 이르는 2470㎞ ‘제왕의 길’에는 111개의 역참이 설치되었고, 신속을 요하는 사항은 하루 300㎞ 이상 달려 일주일 만에 전 구간을 주파했다고 한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통일을 기해 아람어·문자를 제국의 공용언어·문자로 정하고, 조로아스터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 이수스의 전투를 묘사한 폼페이의 모자이크

이처럼 이집트와 소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와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아우르던 대제국 페르시아의 영화도 계속될 수는 없었다. 당시에는 변방에 불과하던 마케도니아 출신으로 약관 24세의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 대왕)에게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기원전 334년 약 4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다다넬즈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로 들어온 그는 먼저 그라니쿠스(Granicus)와 이수스(Issus)에서 페르시아군을 연파하고, 마침내 기원전 331년에는 티그리스강 동쪽에 위치한 가우가멜라(Gaugamela)라는 대평원에서 5배가 넘는 적군에게 괴멸적 타격을 주었다. 도주하던 마지막 황제는 피살되었고 이로써 페르시아 제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수사·페르세폴리스에 무혈입성하면서 제국의 중심부를 그대로 접수했지만, 뒤이어 터진 반란을 진압하고 제국의 변경을 넓히기 위해서 아프간·중앙아시아·인도를 전전해야 했다. 고향을 떠나 10년이 다 돼가도록 계속되는 원정에 지친 그리스 병사의 불만은 극에 달했고, 알렉산드로스는 세계 정복의 꿈을 접고 귀환길에 올랐으나 바빌론에서 33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으로 이제 갓 탄생하려던 제국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의 지휘관들은 제국을 셋으로 분할해 통치하였다. 그리스 본토에 마케도니아 왕국, 이집트 방면에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페르시아 제국의 중심지에 들어선 셀레우코스 왕국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앞의 두 왕국은 후일 로마제국에 병합되었지만 셀레우코스 왕국은 헬레니즘 문화를 동방에 확산·정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헬레니즘 문화의 정착과 확산은 도시를 거점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리스인이 도시(polis)를 중시한 사실을 생각하면 이는 아주 당연한 결과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지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도시들을 건설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러한 전통은 셀레우코스에 의해서도 계승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은 물론 부인과 아들의 이름으로 도시를 건설했다. 이 같은 헬레니즘 도시의 실상을 아주 잘 보여주는 것이 아프가니스탄 북단에서 발견된 아이 하눔(Ay Khanum) 유적지이다.
이 도시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 직후 아무다리아강과 콕차강이 만나는 곳의 삼각형 고지대(높이 60m, 넓이 1800×1500m)에 세워졌다. 도로는 그리스 도시 특유의 격자형으로 만들어졌고, 도시 중앙에는 137×108m의 넓은 광장이 있었으며 거기에서 도리아식·이오니아식·코린트식으로 장식된 108개의 열주(列柱)가 발견되었다. 그리스인의 도시생활에 필수로 여겨지던 시설들, 즉 체력 단련을 위한 김나지온(gymnasion)과 5000명 수용 가능한 극장도 있었다. 플루타크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동방에서는 소포클레스나 유리피테스의 비극 대사들을 외워서 공연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한 가지 흥미로운 유물이 발견되었다. 즉 클레아르코스(Clearchos)라는 사람이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에 있던 150조의 잠언을 석주(石柱)에 새겼는데 석주는 없어지고 그 받침만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이 클레아르코스라는 인물이 3세기 후반에 활동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즉 솔리(Soli) 출신의 클레아르코스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그리스인이 주로 거주하던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한 헬레니즘 문화는 비(非)그리스인 주민에게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인도를 지배하던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기원전 274~236년)이 남긴 석각칙령이 좋은 예이다. 칸다하르에서 발견된 이 석각에는 불교로 개종한 그가 스스로 살생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이 아람어와 그리스어로 새겨져 있었다. 박트리아를 무너뜨리고 중앙아시아에서 인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한 쿠샨 왕국은 북방 유목민인 월지(月氏)인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 역시 헬레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들은 카로슈티(Kharoshti)라는 인도 고유의 문자와 더불어 그리스 문자를 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발행한 금화나 은화의 한쪽 면에는 제우스·헤라클레스·아테나·아틀라스·디오니소스 등 수많은 그리스 계통의 신이 부조되어 있었다.

▲ 비스툰 비문

헬레니즘이 동방세계에 미친 영향을 말할 때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불상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석가모니의 사망부터 불상의 출현까지 약 500년 동안은 무(無)불상의 시대였다. 즉 석가모니는 한 사람의 ‘위대한 각자(覺者)’로 여겨졌고, 회화적으로 그의 존재는 보리수나 발자국 혹은 빈 대좌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암시될 뿐 그를 어떤 신적 존재로 여겨 숭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여기에 변화가 생겨났고 드디어 기원후 1세기경에 불상이 탄생한 것이다. 불상의 기원과 관련해 소위 간다라·그리스 기원설과 마투라·인도 기원설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고, 이에 관한 논쟁은 아직도 분명한 해결점을 찾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간다라에서 만들어진 불상이나 보살상의 모습에서 헬레니즘의 영향을 도외시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부처의 얼굴 모습이 그러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가 걸치고 있는 승복도 그리스·로마인의 토가(toga)를 그대로 본뜬 듯하며, 서 있는 자세 또한 그리스 신상에서 흔히 보이는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 즉 한쪽 다리를 살짝 구부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심지어 사자가죽을 걸치고 몽둥이를 손에 든 헤라클레스가 부처를 협시하는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고, 번개를 휘두르는 제우스를 모방한 듯한 집금강(執金剛·Vajrapani)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헬레니즘의 문화적 영감과 연관되어 탄생한 간다라식 불상의 도상적 표현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불상 제작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반가상과 교각상 같은 독특한 자세의 불상·보살상이 계속 만들어졌고, 석가모니의 생애, 즉 ‘불전(佛傳)’을 주제로 하여 만들어진 예술적 표현도 아주 빈번하게 나타났다. 중앙아시아 쿠차의 키질이나 중국 서북부의 둔황 등지에서 간다라 양식의 입김은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물론 그 입김은 동쪽으로 올수록 점점 약해진 것이 사실이며 우리나라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내기가 더욱 어려워지지만, 불상이 지닌 기본적인 도상적 요소들이 그대로 전달되었다는 점에서 헬레니즘의 물결은 한반도에까지 그 파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가우가멜라

전투


이 전투는 전쟁사에 대서특필되는 유명한 전투이다. 횡대로 뻗은 전열의 길이만 30㎞가 넘었다고 하는 20만 대군을 맞아 알렉산드로스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길이가 3~7m에 달하는 긴 창으로 무장한 밀집보병대(phalanx)가 적의 기병대를 저지한 사실도 주목할 만하지만, 후대의 전쟁사가들은 무엇보다도 알렉산드로스의 천재적인 전술을 지적하였다. 밤중에 기습공격을 하자는 제안에 대해서 “나는 승리를 훔치러 오지 않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그는 결코 혈기만 넘치는 무모한 젊은이가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군 좌ㆍ우익을 중심으로 전투를 전개시킴으로써 적의 막강 기마부대의 주력군을 양쪽으로 갈라지게 하고, 자신은 직속 최정예 컴패니언 기병대를 이끌고 허약해진 적의 중앙을 돌파하여 곧바로 황제의 목숨을 노린 것이다. 폼페이에 남아 있는 거대한 모자이크는 이수스의 전투를 묘사한 것이지만, 적의 정중앙을 파고드는 젊은 영웅과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응시하는 무너지는 제국의 군주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hdkim@snu.ac.kr

[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

(3)]

격돌하는 고대제국

|

흉노와 한

흉노

VS

,

전쟁과 평화의

300

년史 유라시아 역사를 바꾸다


기원전

200

년 항우 이긴 유방

,

흉노족 공격했다 되레 죽을 위기


굴욕적 조약 맺고 공주

·

조공 바쳐… 한 무제 때 강공책 급선회


왕소군의 恨’등 숱한 드라마 남겨


이릉의 화’등 비사 남긴 반세기 전쟁으로 두 제국 국력 쇠퇴


서역

·

한반도까지 넘나들며 유라시아 문명교류에 큰 공헌

▲ 흉노 전사의 모습 스케치

우리는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격돌하는 초한쟁패(楚漢爭覇)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지만, 역발산의 기개세를 자랑하던 항우를 꺾고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그 당시 흉노(匈奴)라는 유목민과 전쟁하다가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온 사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중국인의 입장에서 위대한 한제국의 건국자가 당한 수치스러운 사건, 그것도 북방의 ‘야만인’에게 당한 것이라면 알려져서 무엇이 좋았겠는가.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고 그것은 엄연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한 고조(高祖), 즉 유방은 천하통일의 기세를 몰아 기원전 200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북방의 강호(强胡·강한 오랑캐라는 뜻) 흉노를 치러 나섰다. 마침 겨울에 큰 추위와 함께 많은 눈이 내려 병졸 열 명에 두셋은 동상으로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그러나 묵특이라는 이름을 가진 흉노의 선우(單于·군주의 칭호)는 짐짓 패한 척 도망치며 한나라 군사를 유인하였다. 유방은 ‘32만명’의 대군을 데리고 추격에 나서 마침내 산서성 평성(平城)의 백등산(白登山)이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그는 미처 주력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흉노의 정예 ‘40만 기병’에 포위되고 말았다.
유방은 한겨울에 일주일을 꼬박 갇혀서 식량도 떨어진 채 죽기만 기다리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묵특의 부인에게 몰래 최고급 모피코트를 뇌물로 건네주었고, 이를 받은 그녀가 묵특에게 “당신이 지금 한나라 땅을 차지한다고 해서 거기서 살 것도 아니지 않소?”라고 하며 유방을 풀어줄 것을 권유했고, 이를 받아들인 묵특은 포위망의 한쪽 귀퉁이를 열어서 그를 보내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시작된 한과 흉노 제국의 전쟁과 화평의 관계는 이후 약 300년간 지속된다.
이러한 내용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흉노열전’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으니, 비록 군대의 수에 다소 과장이 있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신뢰할 만한 보고이다. 포위에서 풀려난 유방은 사신을 보내 흉노와 ‘화친(和親)’이라는 이름의 조약을 맺었다고 한다. 그것은 네 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었는데, (1) 만리장성을 양국의 경계로 삼는다 (2) 상호 형제관계를 맺는다 (3) 한나라 공주를 흉노 왕에게 시집보낸다 (4) 매년 흉노에게 옷감과 음식을 보낸다는 것이었다.

▲ 기원전 1세기 무렵 한과 흉노 지도

앞의 두 항목으로 보아서 양국이 평등한 관계인 듯하지만 한나라가 흉노에게 일방적으로 공주와 물자를 바치는 형편이라서, 말이 ‘화친’이지 실제로는 불평등 조약이나 다름없었다. 그 같은 사정은 유방의 미망인 여후(呂后)와 묵특 사이에서 벌어진 소위 ‘농서(弄書)’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유방이 죽은 뒤 묵특은 여후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인즉 “나는 외로운 군주로서 습한 소택지에서 태어나 소와 말이 가득한 들판에서 자라났소. 여러 차례 변경에 가보았는데 중국에 가서 놀고 싶은 희망이 있었소. 이제 그대도 홀로 되어 외롭게 지내고 있으니, 우리 두 사람이 모두 즐겁지 않고 무엇인가 즐길 것이 없는 듯하오. 그러니 각자 갖고 있는 것으로 서로의 없는 것을 메워 봄이 어떻겠소?”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성질이 강퍅하기로 소문난 여후는 이 편지를 받고 모욕과 수치심으로 펄펄 뛰면서 즉각 전쟁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백등산의 치욕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많은 대신이 만류했고, 이에 하는 수 없이 부드러운 내용으로 묵특을 달래는 답장을 써서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 내용도 가관이어서 “폐하께서 저희 조그만 고장을 잊지 않고 글을 내려주시니 저희는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물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저는 이제 늙어서 기력이 쇠하고 머리카락과 이도 다 빠졌으며 걸음걸이도 주체가 안됩니다. 폐하께서 누군가의 말을 잘못 들으신 듯한데, 저와 같이 지내봐야 공연히 힘드시기만 할 것입니다. 저희 고장이 지은 죄가 없으니 널리 용서해 주십시오. 황제의 전용수레 2대에 말을 같이 붙여 보내드릴 테니 항상 타고 다니는 데 쓰옵소서”라는 것이었다


▲ 중국 전국시대 흉노의 금관 / ‘사기’의 저자 사마천의 초상화

그러나 한제국으로서는 이처럼 치욕적인 상황을 계속해서 끌고 나갈 수 없었다. 더구나 서서히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자리잡아 가던 유가사상의 관점에서 천하의 중심이자 덕치의 상징인 천자가 야만의 군주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건국된 지 반세기 이상의 세월이 흐르면서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에 힘입어 국력도 훨씬 더 신장되어 있었다. 이러한 변화를 배경으로 기원전 140년에 즉위한 한 무제는 외교정책을 급선회하여 흉노에 대한 강공책을 채택하였다.
전쟁의 서막은 변경의 조그만 마을 마읍(馬邑)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 한 무제는 흉노와 정면대결을 가능하면 피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기원전 133년 선우를 마읍으로 유인하여 잡으려는 계략을 세우고 수십만의 병사를 그 부근에 배치시켰다. 그러나 계획은 들통이 나버렸고 무제는 할 수 없이 전면전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무제는 위청, 공손오, 공손하, 이광과 같은 장군을 일제히 장성 북방으로 출격시켰고, 이로써 한과 흉노 두 제국 사이에서 50년을 끌게 되는 전쟁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전쟁은 뚜렷한 승자도 패자도 없이 일진일퇴의 양상을 보이며 계속되었다. 그때까지 내몽골을 본거지로 삼고 있던 흉노는 거듭된 한나라의 공격으로 인해 고비사막을 건너 북몽골로 근거를 옮겼다. 무제가 파견한 군대도 이들을 추격하여 북몽골 초원을 전전하였지만 확실한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농민들로 충원된 보병이 주력을 이루던 한나라 군대가 기동력을 주무기로 삼는 유목민을 잡는다는 것은 역시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절망에 빠진 무제는 사신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천자가 직접 병사를 지휘하고 변경에서 기다릴 테니 만약 선우가 대항할 수 없거든 남면(南面)하고 신하를 칭하도록 하시오. 어찌해서 멀리 도망만 다니면서 북방의 춥고 물도 풀도 없는 곳에 숨어 있단 말이오?”
한 무제는 흉노를 측면에서 제압하기 위해 서역으로 진출하여 무위, 장액, 주천, 돈황 등 하서사군(河西四郡)을 설치하고 동방으로는 한반도에 한사군(漢四郡)을 두면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곳곳에서 당한 패배는 참담하기 그지없었고, 조파노(趙破奴), 이릉(李陵), 이광리(李廣利) 등의 장군이 잇따라 흉노에 투항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사기’의 저자 사마천이 연루된 저 유명한 ‘이릉(李陵)의 화(禍)’는 당시의 상황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기원전 99년 장군 이릉은 보졸 5000명을 이끌고 가다가 흉노의 기병 3만명에게 졸지에 포위되고 말았다. 사방에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화살을 세 번 맞은 사람은 수레에 싣고 두 번 맞은 사람은 수레를 끌며 한 번만 맞은 사람은 전투를 계속했지만, 부하를 몰살시키지 않기 위해 결국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투항 소식을 들은 무제는 불같이 화를 냈고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사마천은 이릉이 처했던 상황을 설명하며 이해를 호소했다가 오히려 무제의 분노를 사서 궁형(宮刑)을 당하고 말았다. 한나라가 자신을 배신자로 규정하고 고향에 남은 노모와 처자를 포함한 일족을 참살시켰다는 말을 전해 들은 이릉은 비통의 눈물을 흘리며 북방의 ‘이역인(異域人)’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세기에 걸쳐 계속된 전쟁은 두 강대국을 모두 피폐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기동력이 떨어지는 한나라 군대였지만 해마다 계속되는 원정군의 공격은 흉노인에게 초원의 정상적인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한나라는 매년 막대한 수의 원정군을 파견함으로써 엄청난 재정지출을 감당해야 했고 그로 인한 백성의 곤핍은 극에 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기원전 89년 무제는 “이제부터는 가혹한 정치를 중지하고 지나친 세금을 걷지 말며 농사에 힘쓰도록 하라”는 소위 ‘윤대(輪臺)의 조칙’을 내림으로써 흉노와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한이 건국한 이후 흉노와 가졌던 화친과 전쟁의 역사는 원거리 외교, 인적 교류, 기술과 지식의 전파를 통해서 유라시아의 문명교류사에 큰 유산을 남기게 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장건(張騫)의 서역방문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릉과 같은 ‘이역인’의 모습을 추적해 보기로 하자.


먼저 ‘화번공주’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여인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자 그대로 ‘화번(和蕃)’, 즉 변방 민족과의 화평을 위해 시집 보낸 ‘공주’인데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빼놓고는 황제의 친딸이 보내진 적은 없고 종실의 여자를 ‘공주’라고 꾸며 보낸 것이다. 그 대표적 예가 왕소군(王昭君)이었다. 그녀는 기원전 33년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 보내져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흉노의 우익을 담당한 제후왕이 되기까지 하였으니 나름대로는 잘살았던 셈인데, 어쩐 일인지 그녀는 비운의 여인으로 여겨져 수많은 중국 문인의 심금을 울렸고 급기야 중국 4대 미인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미화’되기에 이르렀다. 한 예로 당나라 때의 시인 동방규(東方叫)는 ‘왕소군의 한(昭君怨)’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저절로 옷띠가 느슨해지니/ 결코 허리 몸매 위함은 아닐세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自然衣帶緩, 非是爲腰身)’. 오늘날 우리가 자주 쓰는 ‘춘래불사춘’이라는 말도 바로 이 시에서 시작된 것이다.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처럼 왜곡된 왕소군의 이야기는 원나라 때 마치원(馬致元)이라는 작가가 쓴 ‘한궁추(漢宮秋)’라는 희곡에서 절정을 이룬다.

초원의 유목민에게 시집보내진 화번공주들은 종종 천막에 살면서 이동생활을 했던 것 같다. 이는 ‘오손공주’가 남긴 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녀는 한 무제가 흉노에 대항할 연맹세력을 구하기 위해 중앙아시아의 오손(烏孫)이라는 유목국가의 임금에게 시집보낸 여인인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천막을 방으로 삼고 펠트를 담장으로 여기면서, 고기를 밥으로 발효한 젖을 장으로 먹는다”고 읊었던 것이다. 화번공주들은 물론 홀몸으로 간 것이 아니었다. 많은 수행원과 몸종이 따라갔는데 북방의 낯선 땅으로 가기 싫은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중항열(中行說)이라는 인물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는 화번공주의 수행원으로 강제로 끌려가면서 “내가 반드시 한나라에 화를 입히리라!”라고 했다고 한다. 사실 그는 한나라에 화를 입히기 위해서 흉노를 강국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흉노왕에게 문서를 기록하는 방법과 사람과 가축의 수를 헤아려 세금을 걷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한나라와 외교서신을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문서의 형식과 내용을 바꾸어, 종래 ‘흉노의 대선우’라는 단순한 칭호를 ‘하늘과 땅이 탄생시키고 해와 달이 즉위시킨 흉노의 대선우’라는 거창한 타이틀로 바꾸도록 했다. 다시 말해 중항열은 결과적으로 중국에서 발달된 통치방식과 천자 개념까지도 흉노 국가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고대 유라시아 대륙의 동부세계는 한과 흉노가 대립하는 남북체제를 기본적인 구조로 갖고 있었다. 이 두 제국은 ‘화친’과 ‘조공’이라는 외교적 틀을 유지했다. 평화가 유지될 때에 거대한 규모의 물자교류가 이루어진 것은 물론, 전쟁에 돌입해서 서로 대치할 때에도 포로와 투항자를 매개로 한 광범위한 인적 교류가 발생했다. 그리고 이 두 제국 사이에 이루어진 격렬한 접촉은 만리장성을 사이에 둔 남북 두 나라는 물론 동쪽으로는 한반도에, 서쪽으로는 서역지방에 깊고 큰 파장을 남겼던 것이다. ▒

왕소군을

주제로

희곡

한궁추

스토리


한나라

원제

흉노에

팔려간

비운의

궁녀


▲ 내몽골 후흐호트에 있는 왕소군 묘.

한나라 원제(元帝) 때에 모연수(毛延壽)라는 이름의 화공이 있었는데, 황제의 후궁이 될 만한 여인들의 모습을 그려서 궁정에 바치는 일을 맡았다. 그는 뇌물을 받고 얼굴을 예쁘게 그려주곤 했는데, 가난한 농부의 딸인 왕소군이 돈을 주지 않자 그녀의 눈밑에 흉터를 그려넣었다. 그래서 소군은 황궁에 들어온 뒤에도 총애를 얻지 못하고 홀로 지냈는데, 어느 날 밤 그녀가 비파를 타며 울적함을 달래다가 마침 뒤뜰을 거닐던 원제의 눈에 뜨여 사랑을 받게 되었다. 사실이 발각되어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한 모연수는 흉노에게 도망쳐 왕소군의 진짜 초상화를 선우에게 바치자, 절세의 미모에 놀란 그는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소군을 부인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흉노의 군사력을 당할 수 없었던 한나라는 거부하지 못하고 소군을 보내기로 결정했고 원제도 애통해하며 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흉노로 팔려 시집가던 도중 국경에 이르자 소군은 흑수(黑水)라는 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다. 흉노의 선우는 소군의 일편단심에 감동하여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었고, 모연수는 압송되어 한나라로 보내져 처형되었다.

/

[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

(4)]

한혈마의

고향

|‘

서역

세계

漢 무제

,

對흉노 연합전선 구축 위해 서역에 장건을 밀사로 파견


장건

,

수차례 구금

·

탈출 끝에

13

년 만에 돌아와


대완

·

오손

·

대하

·

안식 등 서역의 나라들 중국에 알려


,

한혈마 뺏기 위해 서역 정벌


말 숭배사상 강해… 한혈마

,

천마

(

天馬

)

의 후손으로 알려져


기원전

60

년 서역도호부 설치 후 본격 서역 진출 교두보 마련


200

년 후 사신 감영

,

안티오크 진출


중국 비단 중개 독점한 안티오크 상인

,

감영의 로마행 막아


실크로드 통해 로마의 화폐

·

유리제품 등 유라시아 전역에 유통돼

▲ 유라시아의 천마 숭배 사상을 보여주는 경주 천마총 천마도 장니.

6세기경 중국의 양(梁)나라 사람인 종름(宗)이 강남지방의 세시풍습을 기록한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는 칠월 칠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어느 물가에 한 남자가 살았는데, 매년 8월경이면 그곳으로 뗏목 하나가 흘러 내려오곤 했다. 하루는 그가 그 뗏목 위에 조그만 집을 짓고 식량을 많이 실은 뒤 출발하여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10개월 남짓 뗏목을 타고 가다가 어딘가에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훌륭한 누각이 있었고, 그 안을 들여다보니 한 여인이 베틀에서 옷감을 짜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 남자가 소를 끌고 그곳에 와서 물을 먹이기에, 그에게 그곳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돌아가서 촉(蜀)나라에 사는 모모(某某)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그 뒤 그는 다시 뗏목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와 그 모모씨를 찾아 연유를 물어보니, “모년 모월 밤하늘에 갑자기 이름을 알 수 없는 별 하나가 나타나 견우성에 접근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계산을 해보니 그 달은 바로 자기가 뗏목을 타고 그 물가에 도착한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별로 가는 뗏목’을 타고 하늘나라를 다녀온 사람. 중국의 민간설화에서는 그 주인공이 바로 장건(張騫)으로 되어 있는데, 그는 한 무제가 흉노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흉노의 적이었던 월지(月氏)와 연맹을 도모하기 위해 서역으로 파견한 인물이었다. 무제의 밀명을 받은 그는 감보(甘父)라는 흉노인을 길잡이로 데리고 기원전 139년 수도 장안을 출발했다. 그러나 서쪽으로 가는 도중에 흉노에게 발각되어 초원으로 끌려갔다. 거기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는데, 11년이 지난 뒤 드디어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월지를 다시 찾아 나섰지만 월지는 이미 흉노의 공격을 받아 멀리 도망간 뒤였다. 그래서 그는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지방까지 내려갔다. 거기서 월지의 왕을 만나서 무제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미 그곳에 정착해 편안하게 잘 살고 있던 월지인에게 사나운 흉노인과 전쟁하기 위해 머나먼 고향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장건은 빈손으로 귀국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흉노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길, 즉 티베트인이 사는 강중로(羌中路)를 이용했는데 불행하게도 또 붙들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행운의 사나이였다. 흉노에서 일어난 정변을 틈타 1년 만에 탈출에 성공했고, 이번에는 전에 남겨두었던 처자식까지 데리고 귀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장건은 출발한 지 13년이 지난 기원전 126년에 마침내 장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 뗏목 타고 가는 장건.

역사상 장건의 이 여행은 ‘서역착공’이라 불린다. ‘착공(鑿空)’이란 문자 그대로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운 땅을 뚫었다는 뜻이다. 
한 무제는 흉노를 치기 위한 예비전략으로 장건을 파견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자 그를 파견한 지 6년 뒤인 기원전 133년 드디어 흉노와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흉노는 예상보다 훨씬 끈질기고 강한 상대였으며 전황은 어렵게 전개되어 갔다. 바로 그때 장건이 돌아온 것이다. 그는 13년 동안 자기가 보고 들은 ‘서역’의 사정을 황제에게 낱낱이 보고했다. 월지가 동맹을 거부한 것이 실망스러웠지만 그 대신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 있는 오손(烏孫)·대완(大宛)·대하(大夏)·안식(安息)·대진(大秦) 등 여러 나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오손은 천산산맥 북방에 살던 유목민이었고, 대완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부근의 나라였으며, 대하는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그리스인 정권 박트리아, 안식은 파르티아, 대진은 로마를 지칭했다.
그런데 장건이 갖고 온 정보 중에서 한 무제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오손과 대완 지방에 산다고 하는 한혈마(汗血馬)라는 이름의 명마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마(天馬)’의 후손인 이 말은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하루에 천리를 주파할 수 있고 마치 피처럼 붉은 땀을 흘린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한 무제는 대완이라는 나라에 사신을 보내 한혈마를 요청했으나 거부되자 군사적인 방법에 호소했다. 그의 명령을 받은 이광리(李廣利)라는 장군이 기원전 104년 수만의 군사를 데리고 대완을 향해 출발했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도중에 위치한 도시들이 한나라를 도왔다가 혹시 흉노가 보복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성문을 꼭꼭 잠그고 식량 한 톨 제공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병사들은 다 도망갔고 이광리는 수천 명의 남은 병사를 추슬러 돈황으로 돌아왔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무제는 아예 국경의 관문을 닫아 걸고 나라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범죄자와 돈황 현지의 ‘악소년(惡少年)’, 즉 불량배와 변방의 병사로 구성된 6만명을 다시 이광리에게 지휘케 하여 기원전 102년에 제2차 대완원정을 감행했다. 원정군은 대완 지방의 이사(貳師)성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끊고 40여일 포위했다. 견디지 못한 대완 사람들은 화평을 요청했다. 원정군은 한혈마 수십 필과 보통말 3000여필을 받아서 돌아왔다.
동원된 인력이나 투입된 물자에 비해서 한혈마 수십 필을 얻었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한 무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이광리에게 ‘이사장군’이라는 칭호를 하사했고, 또 그렇게 갖고 싶어했던 한혈마를 보고 ‘천마가(天馬歌)’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 시는 한 무제가 그토록 한혈마를 구하고자 했던 까닭이 단순히 전쟁에서 사용할 쾌속마를 확보하기 위함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즉 그는 천마의 후예인 한혈마를 타고 곤륜산에 올라가 서왕모(西王母)를 만나 불로장생의 영약을 얻고자 했고, 나아가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황하의 근원에 도달함으로써 잦은 범람을 일으키는 황하의 치수(治水) 비법을 터득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 무제만 유독 ‘천마’에 집착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부터 3000년 전 카스피해 북방에 거주하던 인도·이란인에 의해 말이 처음으로 순화된 이래 말에 대한 숭배사상은 유라시아 대륙 동서에 넓게 퍼져나갔다. 알타이 고산지대의 파지리크 고분에서는 순록의 뿔로 화려하게 치장된 가면이 씌워진 채 가지런히 순장된 수십 필의 말이 발견되었으니, 이는 망자의 영혼을 천상으로 안내해주는 주인공이 바로 말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9년에는 중국 서부 무위의 한 분묘에서 높이 35㎝ 길이 45㎝ 크기의 청동으로 된 말이 발견되었는데, 뒤로 치켜져 날아가는 듯한 꼬리와 발 아래 깔려 있는 제비의 모습으로 미루어볼 때, 문자 그대로 ‘천마’를 형용한 것임이 분명하다. 지금부터 1800년 전의 것이다. 곽말약(郭沫若)이라는 학자가 지어준 ‘마답비연(馬踏飛燕)’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 이 청동분마상은 오늘날 중국 관광을 대표하는 로고로 사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77년에는 무위에서 가까운 주천의 정가갑(丁家閘) 5호 고분벽화에서 천마가 발견되었다. 이는 1973년 경주 천마총에서 발견된 장니(障泥·말이 달릴 때 흙이 튀어오르지 않도록 안장 아래에 붙이는 차단막)에 그려진 천마와 매우 흡사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아무튼 우여곡절도 많은 사행길이었지만 장건이 전해준 이야기는 세인의 주목을 받아 머나먼 서역에 대한 여러 가지 상상과 설화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한 무제와 같은 통치자에게 서역이라는 신천지는 중국이 정복해야 할 전략적 거점으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한혈마를 비롯한 그곳의 특이한 물산의 확보라는 목적뿐만 아니라 흉노와 같은 북방 유목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었다.
무제는 기원전 108년에는 조파노(趙破奴)라는 장군을 보내어 누란(樓蘭)과 거사(車師)를 정복했고, 그 뒤 이광리를 대완으로 보낸 것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이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노력은 예상처럼 큰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중국의 서역경영에 커다란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선제(宣帝·기원전 73~49) 때였다. 서역의 도시국가들이 흉노와 연맹하여 중국에 적대를 계속하자 정길(鄭吉)이 이끄는 군대가 파견되어 이들 도시를 제압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60년 현재 신강성 윤대(輪臺) 부근에 있는 오루성(烏壘城)에 서역도호부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 장건의 서역 루트

그러나 중국이 서역에 진출하여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그때 마침 흉노가 분열되고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왕망(王莽)의 찬탈로 전한이 망하자 중국은 영향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고, 후한이 들어선 뒤에도 진출은 지지부진했다. 그러다가 1세기 후반 반초(班超)의 활약으로 서역에 대한 패권이 회복되긴 했지만, 그 후로도 중국의 서역 지배는 단절과 연결이 반복되는 삼통삼절이었다. 아무튼 서역도호부를 통해서 입수된 서방세계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사기’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역사서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에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한서’의 작자인 반고(班固)는 반초와 같은 집안 사람이었기 때문에 특히 서역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반초가 서역에서 활약할 때 그가 파견한 감영(甘英)이라는 사신의 일화는 당시 서방세계에 대한 중국 측 지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여서 흥미롭다. 기원전 97년 감영은 가장 서쪽에 있다고 알려진 대진(大秦), 즉 로마를 향해서 출발했다. 당시 대진은 금은보화가 많고 특히 야광벽(夜光璧), 화완포(火浣布), 산호(珊瑚), 호박(琥珀), 유리(琉璃) 및 진귀하고 기이한 물자들이 풍부하게 나는 나라로 알려져 있었다.
감영은 오늘날 아프간과 이란 및 이라크를 거쳐서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조지(條支), 즉 안티오크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가 배를 타려고 했을 때 파르티아인은 “바다가 너무 망망해서 다니는 사람이 바람을 잘 만나면 3개월 만에 건너지만, 만약 풍랑을 만나면 2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래서 출항하는 사람은 3년치 식량을 싣고 가는데, 바다에서 향수병에 걸려 죽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감영은 잔뜩 겁을 먹고 그 길로 돌아오고 말았다.
파르티아인이 이렇게 과장된 말로 그를 겁준 이유는 바로 비단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은 비단의 유일한 생산지였고 로마는 그 최대의 소비지였으며 파르티아는 그 중개자였다. 파르티아인은 중국과 로마가 직접 접촉하게 될 경우 자신들의 중개무역 이익이 사라지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우리가 중국과 서방을 연결하는 육상 교통로를 ‘비단길’ 혹은 ‘실크로드’라고 부르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비단 이외에도 많은 물자가 실크로드를 통해 교류되었고 그것을 판매하는 상인도 왕래하게 되었다. 육상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해상을 통해서도 교류와 접촉은 확대되었다. 로마제국의 화폐가 인도양 해안뿐만 아니라 베트남 남부에서도 발견되었고, 인도양과 동남아 지역에서 나오는 조개와 거북껍질이 중국으로 수입되기도 하였다. 지중해 연안에서 만들어진 유리제품은 중국은 물론 한반도에까지 수입되어 궁정에서 사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로마제국의 대도시에서는 중국산 비단으로 만들어진 얇게 비치는 옷을 걸친 귀족여인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이렇듯 지금부터 이미 2000년 전 실크로드는 유라시아 대륙 여러 지역의 민족과 역사와 문명을 연결하는 대동맥으로서 힘찬 맥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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